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2 (2017)
pp.179~210

1930년대 만주지역의 아편재배와 한인, 그리고 匪賊

박강

(부산외국어대학교 역사관광학과 교수)

‘만주사변’(중국에서는 이를 ‘9ㆍ18사변’이라고 칭함) 이전의 국내 언론의 보도에서 만주지역의 아편문제와 마적은 물론 한인과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기사가 자주 언급되었다. 그렇다면 1930년대 일본의 만주 지배 하에서는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즉 한인 관련을 포함하여 1920년대 동북군벌정권 시기에 성행했던 아편문제가 ‘만주사변’ 이후에는 어떠한 양상으로 변화되었는지 궁금하다.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은 재정수입과 관련하여 점금주의에 근거한 아편전매제도를 실시하였다. 1932년에 아편법과 동시행령을 공포하고 다음해에 전매아편에 필요한 아편의 재배지역 및 지정면적을 포고하였다. 지정지역 내에는 열하성, 흥안성과 함께 과거 아편을 재배한 경험이 있으며 양질의 아편을 생산했던 길림성이 포함되었다. 다음해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 국경지역과 같은 치안이 안정되지 않는 지역까지 허가지역에 포함시켰다. 이 지역 아편 재배농민과의 적대적 관계 해소는 물론 국경지대의 치안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비적, 즉 항일세력의 활동으로 치안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1936년 이전까지 ‘만주국’ 당국은 압록강ㆍ두만강 대안 국경지역의 아편재배를 허가하였다. 국내언론에서는 우려가 높았다. 압록강 대안 장백현의 아편생산에 대해 본업을 망각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요행심을 조장하며, 마적의 습격과 아편 중독자의 증가를 초래하는 등 부정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여 그 폐해가 크다고 보았다. 간도지역 역시 오랫동안 아편재배 경험이 있었으며 1936년 이전까지 아편재배가 허가되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군 당국이 치안대책과 연계하여 이 지역에 집단부락을 건설하였으며, 집단부락 건설 및 이전가옥 신축을 위한 대부금의 변제를 위해 아편재배를 허가하였다. 어떠한 의도에서 아편재배가 허가되었든 '만주국' 건국 직후 만주 이주 한인의 아편경작은 한인에게 있어 벼농사 다음으로 중요한 생업수단이었다. 그런데 1936년에 들어서자 비적 토벌이라는 치안대책과 연계되면서 당국의 아편 재배지역 지정이 일변하였다. ‘만주국’ 건국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일본의 만주지배에 저항하는 비적, 즉 항일세력이 활동하였는데 군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휴식과 보급의 근거지인 산간의 가옥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항일세력의 보급 거점인 산간에 산재한 농가를 모아 집단부락을 건설하여 ‘匪民分離’를 강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편재배 정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군은 산간벽지에서 재배되는 아편이 모두 항일세력의 자금원이라고 보았고 아편재배 장려에서 단호한 박멸로 방침을 변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집단부락 건설의 차입금 변제를 위해 아편재배를 장려해 왔던 간도지역은 물론 빈강성의 동녕, 안동성의 장백현에 대해서도 갑자기 재배 지정을 취소시켜 버림으로써 한인 농촌사회의 심각한 우려를 초래하였다. 요컨대 ‘만주사변’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 국경지역의 이주 한인들은 치안불안이라는 환경 속에서 ‘만주국’ 당국의 일관성 없는 아편 전매제도 시행으로 생업에도 늘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초 ‘만주국’ 당국은 이 지역이 과거 아편재배의 경험이 있는 지역이었고, 경제적으로 빈궁한 지역이었기에 비적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편재배 지역으로 지정하였다. 그것은 전매에 필요한 아편의 확보를 위해, 이 지역 주민에 대한 높은 수익 제공과 당국에 대한 불만 완화, 그리고 집단부락 건설과 관련한 대부금 변제 등이 고려된 결과였다. 그러나 곧 군 당국의 치안숙정계획에 따라 비적, 즉 항일세력의 수입원 차단과 연계되어 압록강ㆍ두만강 대안지역의 아편재배가 갑자기 금지되었다. 이로써 벼농사 다음으로 만주 이주 한인 농촌사회의 중요 생업수단이었던 아편재배가 금지되었고 한인 농촌사회에 심각한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만주사변' 이전 동북군벌 통치하의 낯선 이국땅에서 마적의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아편을 재배했던 일부 한인 궁민들은 1930년대 일본의 ‘만주국’ 수립 이후에도 당국의 일관성 없는 정책 변화로 인해 어떠한 하소연도 못한 채 여전히 고된 삶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The opium cultivation, Korean immigrants and bandits of the Manchurian region in the 1930s

Park, Kang

Articles on the opium problem in Manchuria frequently appeared in the domestic media reports before the Manchuria Incident. There were also reports that the bandits and Korean people were involved in the opium problem. So, how did it change under Japanese rule of Manchuria in the 1930s? During the 1920s, opium problems were rampant during the era of the Northeast Asian regime. Let's take a look at what has changed since the Manchurian Incident. Since the Manchuria Incident, migrant Koreans in the Yalu and Tumen borders were in an environment of security unrest. Manchukuo authorities enforced the opium monopoly system without consistency. Accordingly, immigrant Koreans were always in a precarious situation. Previously, opium was being cultivated in the border area of ​​the Yalu River and Tumen. It was an economically impoverished area. Nevertheless, Manchukuo authorities have designated this place as an opium plantation. It was a result of several considerations. First of all, it was necessary to acquire opium for the monopoly. It was also necessary to provide high income to the local residents. It was a way to mitigate complaints about the authorities. And there was a need to construct a collective village and pay for the loan associated with it. However, in accordance with the plan of the military authorities' Public Security Purification enforcement, opium cultivation was banned suddenly. The cultivation of opium in the border area of ​​the Yalu River and Tumen was thought to have been associated with the income sources of the anti-Japan fighters. As a result, there was a serious upheaval in the Korean rural communities who migrated to Manchuria. Rice farming in the Korean immigrant rural communities was the first means of livelihood. But the cultivation of opium was also an important means of livelihood. Before the Manchurian Incident some poor Korean immigrants grew opium in order to maintain their livelihood. They were taking the threat from bandits Since the establishment of Manchukuo in the 1930s, the authorities ' policies have been inconsistent. So poor Korean immigrants had no choice but to live tough without compl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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