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5 (2018)
pp.5~44

1910년대 박용만의 국제 인식

한애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1919년 3월을 전후하여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와 중국, 러시아에서 외교에 중점을 두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 시기 조직된 한성정부와 이후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박용만은 모두 초대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이는 당시 박용만이 갖고 있던 역량과 그에 대한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러나 박용만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그의 활동의 한 부분인 무장 항일 활동에 치우쳐 있는 게 현실이다. 이 논문은 박용만이 망명을 전후한 시기와 망명 이후 초대 외무총장에 선출되기 이전까지 『신학월보』, 『제국신문』, 『신한민보』, 『국민보』 등에 발표했던 글과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연설문, 그리고 서신 등을 통해 그의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과 변화과정을 정리하고 분석한 것이다. 급진적인 정치개혁가의 길을 선택한 박용만은 상동청년회, 만민공동회, 보안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1905년 미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세 번이나 수감 될 정도로 개혁과 구국에 대한 의지가 굳건했고 실천적이었다. 그러나 큰 포부를 안고 도착한 미국에서 그가 목격한 미국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침략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먼로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한인들에게 국제사회의 냉혹함과 자강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박용만은 1915년을 전후하여 미ㆍ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때를 독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사회적 조직체인 국민회를 ‘정치적 조직’, 즉 임시정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對日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 양성과 함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군단의 세력을 국내와 중국, 러시아지역으로까지 확대시키며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는 1918년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나 파리강화회의 등에 기대를 걸지 않았고, 외교노선을 추구하며 수립된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직을 거부했다. 그는 자국의 이익이 없다면 어떤 나라도 한국인들의 호소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1년 일어나 세계를 주목시켰던 중국의 신해혁명에 대해서도 박용만은 남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당시를 혁명의 시대라고 보고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공화혁명의 성공을 바라고 있었지만 중국이 처한 현실과 그에 따른 여파를 분석하며 혁명 이후의 상황을 크게 우려했다. 박용만은 수많은 글을 통해 국제사회의 현실을 알리고, 분석하며 한인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설득했다. 그가 남긴 글에는 그의 국제관계 인식이 담겨있고, 그 변화과정이 드러난다. 또한 그가 무장 항일노선을 선택하고, 독립전쟁론을 주장한 배경이 결국 그의 국제관계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 독립운동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Park Yongman's Capacity to Grasp the Nature of I​nternational Relations in the 1910s

Han, Ae-ra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and analyze Park Yongman’s capacity and perspective on the complicated and chaotic nature of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r global conflicts between powers in 1910s, by analyzing his speech texts, letters and articles published in journals such as 『Shinhakwolbo』, 『Jekookshinmoon』, 『Shinhanminbo』 and 『Kookminbo』. Around March 1919,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established a provisional government in Korea, China and Russia with an emphasis on international diplomacy. At that time, Park Yongman was elected as the first foreign minister in the organized Seoul and Korea's interim governments. This proves Park Yongman's diplomatic prowess at the time was excellent. The leaders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were sure that he had high expectations. Although he had achieved what common people couldn’t do in various areas, most researches on him have been focused on his armed struggles against Japanese colonialism. But it seems to be part of what he was. Park Yongman, a young radical political reformer, was imprisoned three times. And in 1905 he left for America with great aspirations. But the reality of the United States was discouraging since USA was as bellicose as any other imperial nation. Park Yongman criticized the contradictions of Monroeism, which Americans are proud of, and constantly emphasized the need for calmness and self-sufficiency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He predicted that after 1915, the ambitions of Japan and America would collide with each other and war would take place. In order to rear up an independent army to go to war and to cultivate talented people to lead a new nation, and established the and the . When the First World War broke out, Park Yongman extended the organization of the Korean Military Corporation to Korea, China and Russia. Park Yongman's choice of armed anti-Japaneseism and his argument for independence war was based on his recognition of internation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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