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SSN: 1226-998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108 (2021)
pp.35~81

일제강점기 마산창고주식회사의 연고 결속

김예슬

(동의대 역사인문교양학부 조교수)

본 연구는 마산지역 조선인이 주도하여 설립하고 운영한 마산창고(주)를 연구대상으로 본 회사의 설립 과정과 소속 중역의 연고 실태를 분석하여 ‘연고(緣故)’가 조선인의 회사 조직과 운영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 연구를 통하여 첫째, 마산지역 조선인들이 수이출입 물류가 증가하고 「회사령」이 완화되는 상황 속에서 일본인 운수 독점에 대응하기 위해 1920년 5월 조선인의 첫 운수창고회사인 마산창고(주)를 설립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마산(포)은 개항장에서 제외(1911.1.1.)되었지만, 부산 세관장 허가 아래 항만 이용이 가능하여 물자 유통 역시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1910년 마산의 수이출입품가액(725,703원)은 9년 뒤인 1919년(6,716,882원)에 9.2배나 상승하며 오히려 물류가 확장되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러한 지역 조건에도 일본인 운수창고회사만이 설립되어 화물 운송, 선박 임대, 창고업 등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마산지역 조선인들은 「회사령」 완화로 보다 손쉽게 결속이 가능해지자 마침내 조선인의 ‘창고업, 육상운송업 및 대부업 등’을 담당할 마산창고(주)를 설립하였다. 둘째, 마산창고(주) 운영은 마산포 조선인들이 주도하였다. 회사의 자본금은 10만 원으로, 마산포(이후 원마산) 조선인들이 전체 45.5%를 투자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와 함께 마산 인근 고성, 창원 등의 지역민들이 자본을 더하였다. 일제강점기 마산에 세워진 운수창고회사는 조선인 6개, 일본인 16개로 총 22개였다. 이중 마산창고(주)의 자본 규모는 5위에 해당하였다. 나아가 이 회사가 1940년대까지 유지되는 동안 중역으로 총 52명이 거쳤는데, 이중 조선인이 96.2%(50명)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전 중역의 거주지는 마산 내 거주자가 26명(50%), 외 거주자가 12명(23.1%)이었는데, 지역 내에 주소지를 둔 사람들은 모두 원마산 일대 주거하였다. 또한, 전 중역의 경제 규모는 지구단위가 86.9%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마산창고(주)는 원마산 일대에 생활공간과 함께 경제활동 근간까지 두고 있는 조선인들의 주도 아래 운영되었다. 셋째, 마산창고(주) 조선인 중역 사이에는 ‘연고’가 존재하였다. 연고의 요소로는 교육기관, 지역단체, 경제활동 등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구성전, 옥기환, 김철두 등은 1907년 마산노동야학교 설립에 함께 한 다음 본 회사가 1920년 5월에 세워졌을 때 각기 이사, 감사 등의 중역을 맡음으로써 ‘교육기관’에서 발생한 인적 관계가 경제활동까지 이어진 사례였다. 또한, 이기일, 신유석 등은 회사 동료에서 1924년 10월에 조직된 조선기근마산구제회 부원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지역단체’를 통해 중첩된 인맥을 형성해 나간 경우였다. 구철서는 개인상업체 이성상회에서 함께 근무한 김성현이 이사직을 담당하고 있던 마산창고(주)에 1926년 7월 새로운 중역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는 동일한 ‘경제기관’에서의 활동이 새로운 회사 참여에 발판이 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넷째, 조선인 간의 연고는 회사의 자본과 노동력 형성에 기반이 되었다. 마산창고(주) 초기 주주로 옥기환과 김철두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회사 주주로 참여하기 전부터 마산노동야학교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며, ‘교육기관’에 기반한 연고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주주들 사이에는 동일한 ‘동리’ 출신이라는 연고도 존재하였다. 게다가 본 회사 영업을 총괄하는 지배인 선임에서도 인적 관계가 존재하였는데, 1921년경 지배인을 맡은 김성현은 동일한 ‘동리’, 1929년부터 1935년경까지 담당한 정영재는 개인 능력과 ‘경제기관’이라는 각각의 연고가 참여 연결고리로 작용하였다. 즉, ‘연고’가 조선인들의 회사 설립과 운영에 하나의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마산창고(주) 중역의 연고 사례를 통해 인적 관계가 조선인 회사의 설립과 운영에 하나의 원동력이었음을 확인하였다. 물론, 이러한 지연, 혈연 등에서 비롯된 부정부패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연고는 지양할 대상이다. 다만, 일제강점하 차별적 경제구조와 정책 그리고 자신들의 이권 차지를 위해 조선 각지로 진출한 일본인들로부터 조선인들이 생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연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The Relationship Solidarity of Masan Warehouse Company in Japanese Colonial Era

Kim, Ye-seul

In this study, Masan Warehouse Co., Ltd., which was established and operated by Koreans in the Masan area, was analyzed as a research object, and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the company and the actual conditions of the executives belonging to it were analyzed to determine the effect of 'relationship' on the organization and operation of the Korean company. First, through this study, Koreans in the Masan area established Masan Warehouse Co., Ltd., the first transportation and warehouse company of Koreans, in May 1920 in order to respond to the monopoly of Japanese transportation in a situation where import and export logistics. Second, Masan Warehouse Co., Ltd. was led by Koreans in Masanpo. The company's capital was 100,000won, and Koreans from Masanpo(later Wonmasan) invested 45.5% of the total, accounting for the largest proportion. At the same time, local residents such as Goseong and Changwon near Masan added capital. Furthermore, while the company was maintained until the 1940s, a total of 52 executives passed through, and among them, Koreans accounted for 96.2% (50 people), accounting for an overwhelming proportion. As for the residence of the former executives, 26 (50%) residents of Masan and 12 (23.1%) outside residents lived in the Wonmasan area. Masan Warehouse Co., Ltd. is under the control of Koreans who are there based on economic activities along with living space in the Wonmasan area. Third, there was a relationship between the Korean executives of Masan Warehouse Co., Ltd. Elements of the relationship included educational institutions, local organizations, and economic activities. Representatively, Koo Sung-jeon, Ok Ki-hwan, and Kim Chul-doo joined in the establishment of Masan Nodong Night School in 1907 and then took on executive roles when the company was established in May 1920. In addition, Ki-il Lee and Yoo-seok Shin formed overlapping personal connections through local groups while working together as members of the Masan Relief Society, which was organized in October 1924, as co-workers. In July 1926, Gu Cheol-seo joined Masan Warehouse Co., Ltd., where Kim Seong-hyeon, who worked with him at a commercial company, was in charge of the director position, as a new executive. Fourth,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ns became the basis for the formation of the company's capital and labor force. Ki-hwan Ok and Cheol-doo Kim participated as early shareholders of Masan Warehouse Co., Ltd. They participated in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Masan Nodong Night School before participating as a shareholder of the company, and ties based on educational institutions had already been formed. Also, among the shareholders, there were people from the same neighborhood. In addition, there was a human relationship in the appointment of a manager who oversees the company's sales. Kim Seong-hyeon, who was the manager around 1921, was in the same neighborhood, and Jung Young-jae, who was in charge from 1929 to 1935, the relationship between personal abilities and an economic institution acted as a link. In other words, human relationships were a driving force in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Korean companies. In short, it was confirmed that human relations were a driving force in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a Korean company through the case of the executives of Masan Warehouse Co., Ltd. Of course, due to corruption stemming from such delays and blood ties, ointment should be avoided in modern society. However, it is necessary to examine human relations as a way for Koreans to survive from the discriminatory economic structure and policies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and the Japanese who have advanced to various parts of Joseon to claim their own inter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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